은신처를 가지라
북극 얼음산에 살던 냉기가 놀러 왔음인가. 얼굴에 와 닿아 부벼대는 개구진 바람이 어제보다 배나 차가와라. 여기 외진 산등성이 동네는 양지바른 들판에 집집이 끌어안은 소읍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싸늘하고도 얼얼한 삭풍한설이다. 그래도 뒷산 울창한 덤불숲이 문무백관처럼 도열해 있고, 외롭지 않게 재잘거리는 새떼가 있어 어느 짬 추위를 견딜 수 있음이렷다. 더구나 바깥기온이 가장 추운 새벽 시간, 장작개비가 타는 아랫목은 도솔촌의 불가마요 사랑하는 님의 살품이나 진배없다. 온기로 꽉찬 아랫목이 없다면, 내게 이 수방, 산방, 은신처가 없었다면 과연 어찌됐을꼬.
나는 아무리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새벽 일찍 일어나고야 마는, 곤혹스런 습관으로 괴로운 사람이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길들어진 교회살이의 새벽기도 영향인 거 같다. 아침형 인간보다 좀 더 지독한 새벽형 인간, 노동자들 단잠 깨워 조기 출근을 부추기는 사장님이 안 된 것이 천만다행한 경우이리라.
어릴 적 목사님이었던 아버지의 짐 더미에 달라붙어 목회지 교회를 옮겨 다니면서 자랐었는데, 꼬마 때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새벽기도에 참석해야 하는 신앙생활은, 가혹하고도 때로 끔찍하기조차 했다. 성장기 아이에게 가장 소중한 새벽잠을 빼앗아 버리는, 경건과 열심이라는 이름의 강요된 종교 폭력은 내 어린 시절을 곱절로 우울하게 만들었다.
새벽부터 오만가지 세속적 욕심을 가지런히 나열하여 구시렁대는 기도는 모양새가 좋지 않음은 물론이려니와 사랑하는 가족과 조금이라도 더 평화롭게 누워 잠자게 하는 아량이 자애로우신 하느님 본심이란 확신이 든 것은, 세뇌에서 가까스로 놓여난 어른이 되고서야... (그래도 어머니의 새벽기도로 여태껏 살고 있단 분들을 만나곤 하는데, 그러는 당신은 왜 그토록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새벽기도를 하지 않느냐 질문하면 대개들 말문을 닫더라.)
내가 목사가 된 날로부터 벼르고 벼른 혁명의 일환이자 포근하고 고요한 아침 시간을 위하여 첫 번째로 폐지한 게 바로 새벽기도, 새벽예배였다. 정 그리들 하고 싶으면 각자 골방에서 조용히 하시라 선포하고 교인들을 설득하여 집회를 없앴는데, 수수십년 습관이 든 교인들은 여전히 새벽공기를 가르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배당엘 찾아 오셨다. 나 또한 어김없이 습관에 이끌려 꼭두새벽에 벌떡 깼고, 교인들의 옹골찬 발걸음과 쪼아보는 눈치마다 따가워하며 목사관에 꼼짝 않고 동트기만을 기다렸다. 뭐 그 시간에 기도를 하긴 했었다. 집에 돌아가시는 길 미명이 교통사고 위험이 높은 시간이라 별 탈 없기만을...
목회를 그만 둔지 십여 년 되어가는 지금껏 변함없이 새벽시간 눈이 떠지고 마는데, 알람시계가 따로 없어도 될 정도. 그럴 땐 아껴둔 책을 읽거나 우두커니 동트는 앞산을 지켜보고는 한다. 그러나 내 바람은 역시 독서보다는 이불속에 뒹굴거리며 양껏 푹 단잠을 자는 것이렷다. 게으름을 피우며 늦잠을 푹하니 달게 자고 싶어. 나의 게으른 이 바람, 늦잠 소원을 비난할 분 계실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게으름뱅이 얼굴을 하고 일어나 중천에 뜬 부신 태양을 마주하고 싶은 소박한 바람을 나무라진 말기를. 기름지고 편안하고 안온한 삶을 욕심 하는 것이 아니니까. 얼굴가득 악착같이 허기진 표정, 처절한 생존의 쳇바퀴에서 조금이나마 놓여 살고자 하는 바람의 연속선상일 뿐이니까.
아프리카 마사이 부족의 노래 가운데 이런 노래가 전해지고 있단다.
오! 하느님, 우리를 가슴가득 끌어 안아주세요. 밖에 내치지 말아주세요
오! 하느님, 우리를 엄마 자궁 안에 넣어주시고 다시 꺼내지 말아주세요
오! 하느님, 우리를 태양의 불꽃 안에 타오르게 하시고 꺼트리지 말아주세요
오! 하느님, 우리를 검은 옷자락으로 숨겨주세요. 밖으로 내놓지 말아주세요
오! 하느님, 우리를 맑고 정결한 물로 씻어주시고, 다신 더럽히지 말아주세요
오! 하느님, 우리를 날개 같은 움막에 품어주시고, 짐승들에게 건네지 말아주세요
깊이 숨어 감추어진 겸손한 삶, 대명천지 꺼내져서 널리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 진실한 삶은 정직하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단단하다. 때 묻어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삶, 도시 사는 짐승들이 근접하여 잡아먹지 못하는 산촌의 움막살이는 진정한 평화의 처소렷다. 산짐승은 인간 짐승에 비해 수백 배 아니 수천 배는 온순하며 전혀 탐욕스럽지도 않다. 이를테면 농작물을 나눠먹으려는 멧돼지 가족을 때려죽여야 속이 후련하다는 사람들, 그 현장을 생중계하는 방송사야말로 탐욕의 결정체들이다.
은수자 실바노 아빠스(사막의 스승)는 이렇게 말했다. “유명하다는 여기저기 명소 가까이에 머물지 말 것. 유명하다는 사람의 제자가 되지도 말 것. 수방(은신처)을 지을 때 유명세를 탈만큼 커다란 기초를 놓지 말고, 떠날 생각을 늘 하면서 살 것.”
그대는 누구도 찾을 수 없고 꺼낼 수 없는 영적인 은신처를 가졌는가. 은신처를 둔 사람들은 쉬이 더럽혀지지 않을 영혼을 지녔다. 성질이 더디고 순하며, 거짓에 쉬이 물들지 않는다. 그들은 때로 체제와 정권의 미움을 산 나머지 창살 움막인 감옥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도시 바깥의 먼 오지로 유배되기도 하지만 그 은신처에서 누구보다도 오롯하게 별이 되어 반짝거린다.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자리에서 눈 시린 꽃 한 송이 곱게 피우고는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란 화두로 오늘 우리 문명에다 비수를 들이민 ‘E. F 슈마허’ 선생의 강연집 <굿 워크 Good Work>를 최근 짬을 내어 읽었다. “젊은이들이 거부하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아요.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바보나 로봇, 통근자로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반면 젊은이들이 갈망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랍니다. 나는 내 일을 하고 싶어요. 나는 좀 더 소박하게 살고 싶어요. 나는 가면이 아니라 진짜 인간을 상대하고 싶어요. 내겐 사람과 자연과 아름답고 전일적인 세상이 중요해요. 나는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젊은이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이러한 자기 주도적이고 소박한 삶이 인생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박한 세상, 경쟁의 세태에 등지고 돌아서야 함이 첫 번 순서겠다. 특정한 어디 산골 동네에 꽁꽁 숨으라는 뜻이 아니다. 물어뜯고 짓밟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달려가는 세태에 분명히 반대하고 일떠서면, 그 자리에서부터 자기 삶, 건강하고 진솔한 인생이 비로소 시작된다.
새해가 되면 모두들 더 많은 계획, 더 많은 노력과 생산을 다짐하더라. 그러나 이번 MB정권에서 우리가 뼈저리게 각성할 수 있었듯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일을 난장판처럼 벌이고, 또 고걸 재빠르게 후다닥 대충 얼버무리면서 매듭짓고, 매사 부지런하여 잠도 안자면서 쉼없이 발작발동하며, 결과에 대해서 뻔뻔할 만큼 자신만만한 태도로 일관하는 자들은 위험하고도 흉악한 자들이다.
새해는 임진년 용띠 해라지. 땅을 짓밟고 하늘 높은 데로 승천하는 용이 되기보다 낮은 땅의 지렁이가 되어 흙을 지키고, 땅을 되갈고, 바닥의 친구가 되는 편이 훨씬 거룩하고 아름다운 목숨살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렁이를 우리네 땅의 사람들은 흙의 용, 토룡이라고 부르며 고마워하는 모양이다. 낮은 자리 흙손으로 흙발로 살아가는 민초들을 닮은 지렁이야말로 하늘아래 가장 당당하며 진실한 용가리렷다.
우리는 너무도 허망한 여의주를 물고 유행과 풍조와 인기라는 바람에 휩쓸려 지푸라기처럼 허공을 소용돌이치고 있지는 않은가. 망령된 용들이 하늘을 어지럽힐 때 우리는 은신처 땅에 거하며 조선강산을 수수만년 지키는 토룡이 되자꾸나.
거짓부렁으로 속이고, 정직한 입들은 틀어막고, 권력을 사유화하여 감시와 처벌로 짓누르려는 이들은 대체로 ‘워커 홀릭’,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앞만 보고 달리는 자들이다. 기를 쓰고 드러나려 발버둥치고, 앞장서서 무모하게 획책하려는 자들을 보면 대체로 이렇질 않던가. 가만 멈추는 법이라곤 없다. 그만 중단하는 법이 없다. 잠시라도 쉬는 때가 없다. 뒤로 물러나 자중하는 경우는 눈 씻고도 없다. 그들이 미덕으로 아는 ‘부지런함’은 도가 지나친 탐욕에 가깝다. 결국엔 마른 풀처럼 되어버리고 말 탈진이 기다리고 있음이렷다. 남의 눈에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분주함에 침이 바짝 말라 길에서 넘어지고 말 것이다.
입을 다물고 외로움에 몸을 가두며 단순 소박한 삶으로 영적 허기를 달래야 한다. 육체의 허기만을 달래기 위해 분주한 삶은 얼마나 각박하며 불행한 무엇이런가.
“모든 불행의 원인은 단 한가지다. 고요히 혼자서 자기의 방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이 인간들에게 없다는 것이다.” (파스칼) 들큰한 역한 냄새가 나는, 소음 시끄러운 바깥으로만 떠돌지 말고 영적 은신처에서 눈을 깜박거리면, 그대의 눈은 별처럼 그윽하게 반짝이리라. 뒤로 밀릴 듯 서운하여도 아득한 눈동자로 꾹꾹 다진 몸을 지키고 있노라면 그대의 그 자리가 세계의 중심이며 삶조차 내내 불타는 청춘이다. 초의 선사는 당부한다. “구름 따라 여기에 닿았더니 은거가 좋고 구릉엔 정이 깊어지네. 아름다운 초승달이 밤하늘에 새롭고 저 멀리 서편엔 안개가 드리웠네. 안빈낙도한 선비 가운데 누가 방문할까 싶지만 그 뜻도 현달하면 멀어지리. 강가 피어난 숲에 인적이 뜸하고 그저 살가운 친구는 새들과 물고기 뿐이로다. ” (초의시고/ 두릉시사에서) 이 은신처에서 초의 선사는, 시심을 깊이 하여 착란과 오해와 미망의 세상을 바로 펼쳐 보여주었다.
친구여! 부드럽고 촉촉한 그대여. 시류와 유행의 대오를 벗어나 외톨이가 된 그대여. 나와 그대는 은신처에서 만나자꾸나. 구름 따라 떠돌다가 그곳에 이르자꾸나. 욕심보따리 못채워 눈알이 빨개진 사람들 죄다 떠나고 새와 물고기의 친구로 나머지 생을 산다면 또 어떠한가. 난만한 경력과 이력이 아니라 움푹한 모래 발자국이, 그 자연에 새긴 자취가 당신 생의 가장 귀한 족적이 되기만을 기도한다. 어떤 욕망도 없이 아침을 맞고, 거북이걸음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맹수의 털가죽 벗어던져도 하나 두렵지 않은 알몸이신 당신!
황량한 지상에 시멘트 기초를 놓고 발광하는 저 현란함들 속에서 벗어나 달과 별과 허공과 눈보라와 빈산과 노인과 아이와 도마뱀과 늑대와 갯바위와 어린 다람쥐와 굴뚝새와 신발 신은 지네들, 검독수리와 소금쟁이와 고로쇠나무와 연둣빛 앞산과 눈길 고라니와 엄마 없는 고양이와 산딸나무 잎새와 이끼의 풍란과 연못의 금붕어들, 땅강아지와 탯줄의 첫울음의 친구로 살다 죽어라. 그들의 은신처가 되어주며 살아라. 그리고 그대, 너무 오래 살려하지도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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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남녘교회에서 목사로 오래 지내다 지금은 담양 병풍산 숲속에 은거, 고요하고도 재미나게 살고 있다. 최근 월드뮤직 선곡음반 <여행자의 노래 6집>이 발매되었으며, 신문에 썼던 글을 모은 산문집을 준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