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뱅이의 힘
초근목피(草根木皮)란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라는 뜻이지만, 끼니 연명에 급급한 가난뱅이들의 먹거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옛날 춥고 배고픈 시절에는 냉이 뿌리나 참죽나무 껍질을 삶아먹기도 했다지. 속없는 애들은 그게 웰빙 식단이라 이해할지 모르지만, 옛 시절 배고픔의 고통을 코딱지만큼도 모르고 하는 소리겠다. 각별한 채식주의자들에겐 죄송하지만, 채식이다 육식이다 가려먹을 수 있는 정도라면 이미 배고픈 가난뱅이 수준 이상은 되는, 그러니까 생존이 아닌 건강을 챙기려는, 보다 상위 계층의 ‘입맛살이’일 것이다. 여하튼, 찌든 가난과 아비규환의 전쟁통에서 살아남은 가족애는 남다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오늘의 부강한 한국을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은 거개가 가난한 사람들, 초근목피로 배고픔을 달래던 민중들이었다. 예수 제자들도 탁발 수행에 들어가면서부터 철저히 가난한 떠돌뱅이였다.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구걸로 연명하던 장애인에게 베드로 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도 댁처럼 돈이 없다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한가지 있으니 이것이라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 시로 장애인은 하늘의 은총을 입어 팔짝팔짝 일어나 뛸 수 있게 되었다. “없는 이 보고들 즐거워하라. 주를 찾는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구어라. 가난한 이의 소청을 들어주시고, 사로잡힌 이를 어여삐 여기시는 주님 아니시냐” (시 69:32-33) 가난한 장애인의 형편사정을 아시고, 가장 긴요한 소청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할렐루야 찬송을 바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한편 먹고 사는 문제보다 긴박하고 긴요한 소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손이나 벌리며 적선을 바라는 그이는, 바보 멍텅구리다. 인생에서 가장 긴요한 소청을 묻어둔 채 물질 축복에다 목매는 우리도 마찬가지 바보들 아닐까?
빈털터리 베드로 형도 호주머니에 먼지만 쌓인 가난한 처지이긴 마찬가지. 그러나 베드로 형은 물질의 빈곤과 건강의 없음에 허우적거리는, 세상에서 통상 말하는 그런 가난뱅이가 결코 아니었다. 베드로 형은 예수님과 동행한 뒤로 진정 나눌 것이 있게 된 ‘참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차려야 한다. 요즘 예수 제자들은 반대로 수중에 돈이 참 많다. 그래 나눠 줄 수 있는 게 고작 돈밖에는 없게 되었다. 돈으로 도배를 한 정체모를 건물에 붉은 립스틱같은 십자가를 꽂는다고 해서 그게 어디 교회란 말인가? 또는, 사회복지 선교에 나선 사람들도 곰곰 지켜볼라치면 물질 걱정, 후원금 걱정에 밤잠을 못 이루고 살더라. 누군가 그런 낮고 낮은 투신으로 세상을 밝게 만드는 착한 일도 해야겠지만, 예수 제자들에겐 그 이상의 깊고도 명쾌한 영적 힘이 포도청인 목구녕 건너편에 있어야 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당차게 말할 수 있는, 예수쟁이로서의 본디살이가 있어야 한다. 예수 따름이 제자들은 국가의 사회 복지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준비된 사회복지사들이 절대 아니다. 그러니까 감성적인 연민! 행으로 불우이웃돕기 차원의 후원금을 통한 위력을 가지고서 무슨 사회적, 경제적 복지문제 해결을 보려는 접근은 한계가 분명하다. 청빈(절제와 검소, 나눔을 통한 하나님 나라 세우기)과 겸손(내 이름이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왼손의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자세)의 힘이 우리 가운데 오롯이 바로서야 한다. 믿음의 선배 베드로 형처럼 “나는 돈이 없습니다(나는 맘몬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나는 머리카락이 없습니다”의 마지막 삼손의 괴력처럼, 엄청난 ‘영적 힘’이 생겨나는 거다.
북두칠성, 별구경
여기 담양 병풍산 골짝은 별구경 하기에 적당한 동네다. 노령산맥 가운데 가장 높은 산봉우리이기도 하고, 골짝이 깊어서 어둠도 그만큼 크기 때문이리라. 집 근처 골짜기에 자리 잡은 성암청소년 수련장 안에는 6인치 굴절 망원경과 4대의 80mm 굴절망원경을 가진 천체관측소가 있을 정도다. 교육생이 아닌 일반인에게 열려있는 공간은 아니어서, 아랫동네 주민들에겐 아쉽게도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구가 담양으로 이거한 기념으로다가 선물해준 천체 망원경은 내 일상의 수도원이며 성물 노릇을 해주고 있다. 눈에 불 켜고 별자리 교본을 들여다보면서 밤이면 밤마다 마당에 나가 별구경으로 지새기를 몇 해 째인가. 내겐 밤하늘 별자리를 찾는 그 시간이 신학수업 시간이고, 영성 수련 시간이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교회마다 천체망원경 하나쯤 있으면 참말 좋겠다는 생각이다. 먼저 목사님, 신부님들이 별을 사랑하고 별을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옛적 낙타를 타고 유랑하던 동방박사들처럼 그대도 별을 보고 걷다가, 별이 멈춘 집을 방문한다면 아기 예수님이 분명 누워 계실 것이다.
나는 밤하늘을 밝히는 북두칠성, 붙박이 별인 일곱 개의 별이 가장 마음에 끌리더라. 어두운 밤에도 또렷또렷 별빛 행렬은 그저 장엄할 따름이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이 어둡고 캄캄한 시절에 북두칠성으로 빛나는 예수님을 묵상해 본다.
그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또 눈같이 희었으며, 그분은 불꽃같았고, 그 발은 풀무불에 단 놋쇠 같앗으며, 그분의 음성은 큰 물소리 같았습니다. 오른손에는 일곱별을 쥐고 계셨으며, 입에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고 그 얼굴은 대낮은 태양처럼 빛났습니다.(계 1:13 이하)
아무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생명, 그 자유로운 별빛이 바로 예수님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자면, 둘러싸인 엄청난 두께의 어둠을 밀어내고 초롱초롱 빛나는 부활의 결정체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끈기 있게 살아 반짝이는 생명체, 검정색깔 죽음의 연막으로도 막을 수 없는 별빛 일곱 개가 새어나와 거기 그 자리 갈보리 하늘 위에 탱글탱글 야무지구나. 예수님이 오른손에 북두칠성을 쥐고 계시다는 계시록의 말씀은, 그날 무덤에서 새어 나온 빛이 북두칠성 별빛이 아닐까도 상상하게 만든다. 마치 굴렁쇠를 굴리듯 별빛을 굴리면서 어두운 무덤의 밤을 깨트리고 달려 나오는 새벽 같은 아이를 바라보자. 그 아이는 별에서 시작하여 별로 마침표를 그은 별나라 어린왕자. 등에 일곱 개의 별점이 박힌 아기장수다. 우리들의 한분뿐인 진정한 스타, 예수 그리스도다.
땅바닥에 쓴 글씨
개구리가 안경을 고쳐 쓰고 나온 새봄이구나. 밭에다 감자를 심고, 상추씨를 뿌리는 둥 농사철이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에 성경책을 읽다가 붉은 흙을 매만지다가 땅에다 글씨를 쓰는 예수님을 만났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죽이려할 때,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쓰셨다.(요 8:6)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여보시오들. 그대들 가운데 털어서 죄가 없다는 사람들부터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보시오.” 부딪히는 눈길마다 불꽃이 튀겼을 장면이다.
땅에 글씨는 왜 쓰셨을까? 모세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쓰셨다는 두 개의 돌판’에 대한 기억(출 31:18)을 떠올리게 하기 위한 제스처였을까? 너희들도 하나님이 쓰신 율법의 돌판 앞에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할 만한 사람들이 있느냐는 듯 말이다. 또는, 이 여자의 죄보다 무거운 너희들의 죄를 나는 낱낱이 알고 있다며 이것을 보라고, 첫째 둘째 셋째 적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셔서 역사상 가장 명쾌하고 자비로운 판결과 용서로 죄 많은 여인에게 제2의 새 삶을 선물해 주신다.
양심에 찔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나이 많은 순서부터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고 한다.(요 8:9) 역시 죄는 세월 따라, 나이 순서로 많아지는 모양이다. 그래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더 많이 해야 한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을 향하여 헐뜯고 삿대질할 처지가 전혀 못된다. “너나 잘하세요” 소리를 그렇게도 듣고 싶으면, 뭐 어쩔 수 없고…
예수께서 몸을 굽히고 땅바닥에 쓰신 그 글씨처럼, 오늘 우리는 우리가 쓴 글이 생명을 살리는 글, 죄인을 용서하고 놓아주는 자비와 해방의 글이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글이 사람을 옭아매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마침내 죽게 만드는 그런 살상용 글이 되지 않기를…
땅에 짓는 농사란 모름지기 살리는 짓, 살리는 노동이다. 오늘도 땅에 글씨를 쓰는 농민들에게서 나는 예수님을 본다. 농민의 글은, 글씨는, 논과 밭에 반듯반듯 선명하게 적혀 있다. 페루 나스카의 고대문명이 아로새긴 거대한 활주로 그림보다 선명한 우리네 논두렁 밭두렁을 보라. 거기 쓰인 작은 예수들의 사연 많은 글씨들…
물에 빠진 나에게 내민 손
아이의 얼굴을 매만지며 볼에 입맞춤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살그머니 붙잡을 때, 앳된 털복숭이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을 때 우리는 순간 행복감을 느낀다. 물에 빠진 제자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신 이야기(마 14:31)는 그대들도 잘 알고 계신 얘기 한 토막. 앞에 벌어진 구구절절은 빼고, 위급상황에서 서둘러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친구는 그 시로 물귀신이 되고 말았을 게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스킨십이라고 할 수는 없겠고, 예수님과 얽힌 이야기의 대다수는 매만짐, 손 잡아줌, 안김…, 그와 같은 스킨십과 관련되어 있다. 아마도 제자들과 자주 악수를 나누었을 거고, 아픈 친구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실 때는 손바닥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을 것이다. 하루는 회당장 어른의 금이야 옥이야 하던 아이가 죽자 그 아이 손을 잡아 일으켜 살리기도 했다.(마 9:25) 예수가 내민 손은 마치 거대한 자석이나 되는 것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셌다. 죽은 아이도 손에 이끌리면 벌떡 일어날 만큼 말이다.
사진기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정치인들이 재래시장에 나타나 내미는 악수는 차라리 뻔뻔한 속임수라고 하는 편이 맞아! 진실로 사랑하고, 연민하고, 아껴주려는 마음으로 내미는 손은, 손길은 결코 선전용일 수 없고 얼음처럼 차가운 배신과 변절이 뒤따르지 않는다. “제가 손발이 좀 차요.” 가끔 악수를 하면 상대 쪽에서 이런 말로 쑥스러워 하더라. 하지만 진실한 마음이 전달되면 그런 손바닥 온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법. 따뜻한 마음으로 내미는 손이란, 온도계로 잴 수 있는 무엇이 결코 아닐 테니까.
진실하게 사랑을 담아 악수를 먼저 청한다면 손끝으로 전기가 찌르르르… 사랑하는 감정이 전해져서 마침내 따스한 포옹을 나누게 되리라. 그런 온기 가득한 악수로 세상살이 마음의 기온이 쑥쑥 올라가야지, 생뚱맞게도 남극 북극 빙하가 녹아내리는 기온상승은 대체 무슨 재변이란 말이냐.
(2009. 4. 월간 기독교사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