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이라는 말 한마디 쓴 것뿐인데 이미 옆구리가 따듯하여 꽃샘추위가 싸악 가시는 듯 해. 곁을 내주고 이웃하여 둘러앉은 산골 마을엔 그래 봄신령이 다투어 찾아오나봐. 사람 사는 집은 제아무리 북향집이라도 지붕을 덮은 눈이 재빨리 녹고 정원의 꽃도 서둘러 핀다고 한다. 사람이 살지 않고 내버려진 집, 주인이 가끔가다 한번씩 찾는 주말별장엔 지붕에 눈도 오래도록 녹지 않고 수선화도 대부분 늦게 싹을 틔우더라. 사람도 마찬가지일 게야. 친구들이 보고파서 자꾸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꼴도 보기 싫어 전화번호부에서 지워버린 사람이 있다. 비교해보면 행복지수가 큰 차이가 나겠지. 후자가 되지 않도록 살아야겠지?
우리 동네는 읍과 대도시가 가깝긴 하지만 병풍산과 삼인산에 가두어져 나름 심심산골 냄새가 풀풀 난다. 전에 남녘교회 목사 시절엔 누려보지 못한 익명의 행복이 있고, 그래 보통들 임씨, 임사장, 때로는 차림새 때문에 털북숭이 외국인 소리도 듣고, 무분별한 개발을 막아 세우면 ‘중정 모르는 외지인’이라며 눈 흘김조차 다정한 마음이다. 전혀 놀랍지 않고 두렵지 않은 것은 내 안에 계신 ‘곁님’ 때문이리라. 그대에겐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겠고, 석가모니 부처님이기도 하겠고, 내겐 예수님이기도 하다. 누군 ‘샨티’하고 인사하거나 ‘인샬라’로 인사하는 사막의 신령님이기도 하겠지. 나는 갈릴리의 예수처럼 외진 골목에서, 친구로 이웃으로 살다가 종이꽃 내건 꽃상여에 올라타고 싶을 따름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 가운데 똥을 푸고 살아야 했던 불가촉천민 출신 ‘니디’라는 스님이 있었다. 똥을 푸는 걸 업으로 삼던 니디를 곁에 불러 제자를 삼으신 부처님. 당시도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그쪽 지방에선 파격을 넘은 혁명에 가까운 품어냄이렷다. 지극히 낮은 자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곁을 내어주는 마음, 수천 년 세상이 진화해도 온갖 종류의 차별로 여전히 경계를 긋고 사는 오늘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야기다. 외교통 정치인 누구말대로 컴컴한 곳, 외진 곳을 세인들은 기피하고 외면한다. 앞줄이 아닌 뒷줄 사람들의 곁이 되어주고 우의를 나누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사람됨의 기본으로 삼아야 할 바탕은 역시 연민이며 관용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신비는 누구에게나 아름다움을 본다. 까마귀가 독수리가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북미인디언 스콰미시족의 격언마냥 참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면 세상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무엇일테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은 미안하지만 안계시다(없다). 사람은 지지고 볶으면서, 맨살을 부비며 살아가게 되어있는 존재다. 제아무리 세상 버린 은수자라 해도 사람은 사람의 곁을 기대면서 살게 되어있다. 조금도 차별 없이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곁을 내어주며 오붓이 사랑하는 세상은 이미 흐드러진 봄꽃세상, 밤하늘도 눈부신 별천지리라.
하느님은 성탄절 대목 맞춰 단 한 아이로 둔갑하여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 굴하지 않고 올해도 나락씨를 씻는 아재와 아짐, 산비탈에 블루베리를 심고 애가 탄 귀농인, 비닐하우스에서 땀 흘리며 딸기를 따는 아낙, 기우뚱한 리어카를 끌고 가는 촌로, 자전거포에서 펑크를 때우며 담배를 꼬나문 진씨 아재, 붉은 벽돌로 무너진 담장을 다시 쌓는 미장쟁이, 섬마을 새로 지붕을 엮는다는 고금도 친구, 진탕 뻘밭에서 꼬막을 찾는 꼬부랑 벌교 할매, 딱따구리가 발톱으로 안간힘을 쓰며 나무를 붙잡듯 땅만 보고 산 농투성이들 그들 모두가 거룩하고 신령한 신의 다채로운 현신들이다.
“그리스도, 당신을 사랑해. 어느 별에서 내려와서가 아니라 당신은 나를 깨우치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사람은 피, 눈물, 닫힌 빛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와 연장을 지닌 존래란 걸! 그래... 당신은 사람이 신이란 걸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지... 불쌍한 신, 당신처럼 십자가에 박힌 불쌍한 신. 저기 골고다, 당신 왼편에 박혀 있는 저 좀도둑 역시..... 당신처럼 신이란 걸!” (그리스도, 레온 펠리페의 시집 [오, 이 낡고 부서진 바이올린]에서)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가 죽고 그의 너덜너덜 찢긴 배낭 속에 발견된 ‘녹색 노트’에 기록된, 체가 평소 즐겨 읽고 암송하던 시 가운데 한대목이다. 허무맹랑한 공중의 거짓된 신을 믿느라 우리는 우리 곁에 가까이, 지극히 낮은 바닥사람들로 찾아온, 나타난, 드러난 신을 깨닫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곁이 되어 ‘나투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세하지 않고 또한 거만하지 않다. 근착된 인민의 말로 소통하며, 고양이 쥐 생각하듯 거드름피우는 말이랑 일절 내뱉지 않는다. 연민하고 또 공감하면서, “오메 으짜스까라우(아이고 어쩐대요 글쎄)”, “긍게라우(그러니까요)” 맞장구를 치며 거든다. 항시 호박꽃 닮은 주름져도 환한 얼굴로, 호박구덩이 같은 깊은 가슴팍으로, 호박처럼 둥근 마음씀으로 품어주는 이웃들... 이처럼 하느님인 곁님이 없다면, 사람이 살만한 마을도 없고 가슴 찡한 세상도 없는 것이다. 오래 슬펐던 마음도 따순 곁을 느낄 때라야 그 순연하고 절절한 마음에 은혜와 위로를 입게 된다. 곁들로 둘러싸인 마을은 그래서 병원보다 나은 치료소인 게다. 푸르고 성성하게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방도는 오직 하나, 곁의 지극한 사랑과 돌봄뿐이리라.
고요함 속에서 생명을 키우는 것들을 살펴보면 그윽한 사랑의 봇물을 대어주는 곁님이 가까이에 감추어져 있음이렷다. 그런 걸 음덕이라 부른다던가. 칠팔월 목 타는 옥수수 밭에 늙은 개가 똑같이 늙은 주인을 애타게 염려하며 컹컹 짖을 때, 정강이까지 빠지는 갯벌에서 고무다라를 밀고 나오는 여인네의 몰숨이 작은 포구를 파도소리만큼 뒤덮을 때, 그 때 눈에 암암히 차오르는 식구들 얼굴... 오! 밀물 같은 얼굴들... 딱딱한 말의 언어 말고, 몸으로 살로 느끼는 그런 사랑이 아마도 우리들의 세계를 이만큼 지탱하게 하는 것이리라.
만물을 하늘로 알고 섬기라는 동학의 가르침을 굳이 꺼내들지 않더라도 사람은 본디 강, 나무, 바다, 섬과 바위, 하늘, 꽃, 새들, 별과 달과 해, 나와 너와 우리로 이루어진, 모든 요소들의 집합 대명사다.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놓으면, 곁을 내주지 않으면 그 때부터 사람의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시방 제주섬엔 정한수로 쓰던 할망물이 샘솟는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고 그 자리에 해군기지 건설을 가시화하는 중이다. 도저히 인간의 짓이라 믿기지 않는다. 우리네 무당산 옹달샘에도 할매들의 기도 흔적, 촛농으로 가득했었다. 그런 거룩한 기도처들이 속속 파괴되고 있는 형편이다. 돈 귀신에 들려 지리산 꼭대기까지 쇠줄을 매단 관광 케이블카를 세우려 난리고, 오늘도 만신창이 시멘트덩어리로 흐느끼는 우리들의 젖줄 강물. 폭력을 동원 수십만 볼트짜리 송전탑을 밀어붙여 마을 어르신을 자결하기까지 내몬 이 야만의 사회에서 사람의 바른 모습은 정히 불가능한 것인가.
같은 혈육과 총부리를 겨누는 분단 상황에서 우리는 결코 정상적인 인간 존재가 아닐것이다. 곁님이 곧 나 자신이라는 인식, 사라져가는 소중한 영혼들과 지혜들이 곧 내 모습이라는 자각을 하게 될 때 사뭇 두려움이 생긴다. 이 많은 부조리와 상실과 파탄지경인 현실... 농토는 점차 가시권 밖으로 밀려나고 쇠락한 마을엔 흉가가 늘며, 재미로 동물을 쏘아 죽이는 게 레저산업이 되고 오기로 섬을 폭파하고 강에 보를 막는 게 나라발전이라는 이 땅. 결국 소시민적으로다가 죽자 살자 애인만을 탐하고, 가족만을 위로로 알고 살면 자족이 될 것인가?
시절에 버성기다가 결국 무너져 내리는 아름다운 것들. 구닥다리 구식이라 하여 내버려지는 것들. 지우개로 싹싹 지워버리는 소중한 기억들. 그러나 그대 현자라면 여기서 급정거하고 한번 뒤돌아보아야 하리라. 잃어버리는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 모든 짓무른 눈빛의 목숨 것들에 마음을 가까이 가져다보아야 한다. 정짓간 누룽지 박박 긁는 소리, 어머니의 발등에 별빛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 고무신 속 곰지락거리는 발가락 소리, 긴꼬리 제비나비가 팔랑거리면서 날아오르는 소리, 왈콱 눈이 부신 봄날 춘곤을 깨우는 아버지의 마른 기침 소리, 관세음을 웃게 만드는 석공의 부지런한 망치질 소리, 하교길 도시락 속에서 달그닥 거리던 숟가락 소리도 정녕 다시 들을 수 없단 말인가. 이러한 익숙하던 곁들이 대부분 사라진 지금, 그 자리를 메운 온갖 편리와 손익을 따져 만나는 인간관계와 갖가지 신식 전자 기기... 이들 후유증으로 찾아온, 견딜 수 없는 단절과 고독은 현대인들을 극심한 두통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복화술사의 벙긋거리는 시늉 입술이 아니라 우리는 잠들지 않는 바다처럼 깨어서 곁님들을 불러보고 매만지자. 흙먼지 나는 황톳길을 걷고 걸어 오래도록 곁이었던 변두리의 넋집에 세모래밭 쌓듯 꽃송이를 차곡차곡 모아보자. 쪼그라든 젖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풍상에 어그러진 얼굴 한번 다시 쓰다듬어 보자. 하늘 아래 모든 곁님들, 복사꽃망울처럼 터지는 그 눈물나는 축원들, 오늘만큼 내일도 그리워할 수 있도록 반드시 지켜내야 할 정겹고 익숙한 인연들, 풍경들을 차례차례 헤아려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