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걷는 사람
한번은 나사로, 마리아, 마르타 이렇게 남매들이 사는 베다니아 마을로 향하려던 예수를 제자들이 위험하다면서 뜯어말린 일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낮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이어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1, 9-11)
조금이라도 해가 있을 때 어서 일어나 가자며 일행들을 재촉하는 예수. 사실 예수는 나사로가 심히 아프다는 말을 듣고도 이틀이 지난 뒤에서야 굼뜬 행로를 결정한 터였다. 그런데 정황상 오판이라기보다는 예수가 나사로 가족과 제자들 앞에서 보일 놀라운 ‘죽음 부정’, ‘부활 시연’을 앞두고 마음 준비를 위한 충분한 ‘기다림의 시간’을 갖도록 조처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예수의 그간을 지켜본 바로는 언제나 ‘신중함’과 ‘자생력을 기르도록 만드는 배려’가 깃들어 있지 않던가. 이건 ‘우유부단’이나 ‘회피’와 전혀 다른 무엇이렷다. 가지고 있던 영적 초능력을 섣불리 사용하지도 않으시며, 그걸 자랑삼지도 않는 분이 바로 예수렷다. 호들갑스럽기 짝이 없던 마법사들, 가짜 예언자들과 정반대 다른 모습이다. 예수는 한없이 겸손하고 절제하며 삶의 자세에 있어 기다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신 분이었다.
그러나 신중한 머무름 다음에 내린 결심부터는 날렵하고도 저돌적인 행보가 또한 예수의 주특기였다. ‘해가 있을 때 유다로 돌아가자’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유다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에 제자들은 아주 깜짝 놀라고 만다. 전처럼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여행이 될 것이 뻔할 터. 하지만 예수는 친구의 위중함을 내버려 둘 수 없어 호랑이 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려고 결심한다.
예수의 베다니아 진입(잠입?)에 동조한 것은 오직 제자 도마뿐이었다.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 합시다” (11, 16) 생사를 같이 하자는 이런 각오를 먼저 밝힐 수 있는 사람은 도마뿐이었다. 말뿐이 아니라 도마는 생의 전부를 예수와 생사를 같이하는 일에 송두리째 바쳤다. 요한복음에선 디두모라고 쓰인, 쌍둥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제자 도마. 시리아와 예멘 정교회 수도승들 일부는 도마를 예수의 쌍둥이 형제라 믿기도 한다는데, 그만큼 예수의 행보에 적극성을 가지고 동조한 신앙 실천을 높이 흠숭하는 것이리라.
도마는 파르디아, 인도, 에티오피아, 그 밖에 여러 아시아 각국을 순화하면서 예수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투옥되어 순교로 생을 마쳤다. 진짜 예수와 생사를 같이 하며 땅끝까지 순례했던 사람... 해가 있을 때, 낮에 부지런히 걷는 사람... 남녀노소 빈부 학연 지연 혈연,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어둠을 걷어내고 화창한 낮에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걸어가는 걸음 걸음들...
믿음 운동, 잔치 운동, 하나님 나라 운동을 가리켜 농민운동가 정호경 신부는 말하기를, 첫째 어울리고, 둘째 깨우치고, 셋째 싸우면서 넷째 건설하는 길이라 했다. 어울리고 깨우치고 싸우면서 건설하는 하나님 나라는 캄캄한 어두운 밤에 지을 수는 없는 나라다. 환한 대낮, 아직 해가 있을 때 광명한 이승에서 짓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다. 죽음이후에 만드는 하나님 나라는 허깨비놀음일 뿐.
마침내 예수는 베다니아에 도착하여 잠든 나사로, 죽은 나사로, 어둠에 사로잡혀 숨이 꺼진 친구를 무덤에서 꺼내신다.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따라온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 나라의 임재를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나사로의 부활! 깨꽃 붉은 꽃잎이 일렁이는 부활의 아침! 빳빳하게 얼음처럼 굳었던 주검이 풀리고, 위앓이처럼 경련하던 현사시나무가 푸르게 출렁거리는 한낮의 소생... 새벽 오줌보를 풀 듯 시원하게 걸음하며 새 숨을 쉬면서 달려가는 나사로를 본 주민들은 충격에 사로잡힐 수 밖에... 군중들은 진심으로 예수를 생명의 주인으로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면서 그들 예수 일행이 확보해간 해방구는 그러나 아직까지 미미하고 소소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대적자들은 호시탐탐 어둠으로 이 화창한 하나님 나라를 뒤덮으려고 모의하기 바빴다. “이것을 본 대사제들은 나사로도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나사로 때문에 수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버리고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12,11)
생명과 자유, 해방으로 넘실거리는 햇살이 동네에 가득한데, 어둠에 사로잡혀 어둠을 살고 어둠을 걷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불의한 자들은 그 앞길이 캄캄하여 넘어져도 무엇에 걸렸는지 알지 못한다.”(잠언 4, 19)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겐 정말 답이 없는 겐가.
욕쟁이 예수
예수는 한편 고슴도치처럼 가시로 무장한 독설가요 걸쭉한 욕쟁이였다. 입에 욕을 매달고 다니는 그 따위 막말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웅크린 박쥐처럼 처세하면서 눈치나 살살 살피다가 꼬리를 살짝 내리는 주눅장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분은 한번 화가 났다하면 욕이 심장까지 파고들도록 매부리코를 치켜세우며 입성을 높였는데, 경비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불며 쫓아 나올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이러구러 욕을 내뱉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마태 12, 34), “이 뱀 같은 놈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할까보냐?” (마태 23, 33) 아람말로 ‘독사를 닮은 놈’이라는 욕은 보통 밑바닥 사람들이 멱살잡이 싸움판에서 쓰던 욕지기였다. 일상에서 쓰는 ‘도둑놈’, ‘사기꾼’, ‘개 같이 누구하고나 흘레붙는 놈’, ‘욕심꾸러기 같은 놈’, ‘세리 같은 놈’과 어깨를 같이 하지만 ‘족속들’, 패밀리를 싸잡아 욕할 때에는 뱀 떼, 독사의 족속이란 말을 썼다.
독사는 살인자요 교활한 유혹자를 상징한다. 이집트에서 탈출해 맨발로 사막을 건널 때 무시무시한 ‘불 뱀’을 만나 다들 죽게 생기자 야웨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높은 장대에 ‘구리 뱀’을 올려놓고 그걸 바라보면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악한 뱀 같은 자들을 만났을 때, 분노해야 할 때 마땅히 분노하는 예수! 굳게 닫힌 창틈으로 난입하는 빗소리처럼 그의 분노하는 목소리는 위선자들, 부패한 정재계와 종교계 인사들과 추종자들을 매섭게 내리쳤다.
중저음 성우스타일 뺨치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만 열면 착하고 듣기에 달콤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재수 없다. 왔다리 갔다리 구렁이처럼 유연한 처세가 세상에선 인기를 얻고, 성숙한 자세라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듣기 좋은 소리로 세상을 속이는 자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날고기를 먹어야 하는 법도 배워야 하는데 양념에 조리가 다 된 좋은 말만 떠먹고 사는 세태다. 찬바람을 맞으며 심하게 짤랑거리는 쇠물고기 풍경을 보라. 찬바람처럼 매운 욕도 얻어먹을 줄 알고, 욕먹고 깨달을 줄도 아는 법을 풍경은 지긋이 보여주고 있다. 마침내 심심하고 무료한 어느 날 오후, 쟁그렁... 쨍그렁... 사원에 한마디 던지는 각성과 파문의 소리, 오! 풍경소리.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는 온건한 사람을 무척 경계했다. “온건이라는 말은 제국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말 가운데 하나다. 온건주의자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거나 혹은 어떤 형태의 배신을 모의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킬 뿐이다. 민중은, 결코 온건하지 않고 격정어리며 과격하다.”
우찌무라 간조는 아모스 5장 14-15절에 대한 주석을 달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리스도 신자는 온유하고 자애심이 깊은 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정견, 무절제, 무원칙, 뼈 없는 문어 같은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동시에 미워해야 할 자를 분명히 미워한다. 동양식 군자나 영웅과는 전혀 다르다.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두루뭉수리로 포용하여 다 내 것으로 삼는 정치가적인 도량과는 관계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묵인하거나 악을 벗 삼지 않는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되 죄에 대하여는 참을 수 없는 미움의 감정을 터트리며, 손톱만큼도 악을 부추기는 따위의 언동을 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무엇보다도 위선을 미워한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악한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극도의 증오심을 품는다. 그는 혹시 자기 자신의 몸이 찢기는 한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지만 위선자들이 날뛰는 꼴을 보고서는 그냥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린다. 그는 결코 성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 정의를 위해서는 열화와 같이 분노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는 성깔 있는 사람, 비위가 맞지 않으면 얼굴색이 싸늘하게 바뀌는 그런 ‘화내는 사람’이었다. 잔잔한 바다였다가 너울치는 성난 파도가 되어 바위섬을 우장창 덮치기도 했다. 항시 예쁜 말만 골라서 아첨하며 높은 자 가진 자 있는 자 웃는 자 이긴 자의 비위를 맞추고 살지 않으셨다.
아릿한 사랑이었다가 불붙는 분노가 될 줄 아는 사람, 거짓과 허상을 통렬하게 꼬집고 비판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노점의 리어카가 오르막길에서 신음을 뱉을 때 같이 신음을 뱉고, 노점상이 제 분에 못이겨 욕을 뱉을 때 같이 편들며 욕을 내뱉는 분. 살을 깎는 엄동을 앞두고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떨고 있다. 헤지고 찢긴 옷 한 벌 달랑 걸친 가난뱅이들 앞에서 웅장한 예배당을 지어놓고 치렁치렁하게 예복을 차려입은 뒤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위선자들, 종교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쌍욕을 퍼붓던 예수를 그대 잊지 말라!
금과 물고기를 버리라
요새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더라. 나는 뭐 금이라곤 한 돈은 고사하고 코딱지만큼도 없으니까 다 남의 사정이요 남의 이야기렷다.
미국에선 1849년생을 가리켜 포티나이너(Forty niner)라 부른다. 서부 사막 땅에 금광이 발견되자 일확천금을 바라는 자들의 골드러시가 이어지던 시대 사람들을 가리킴이다. 이들 포티나이너의 삶을 노래한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은 광산촌의 쓸쓸한 풍경까지 쑤알쑤알 노래로 담고 있다. “골짜기와 동굴에서 금을 찾고 있던 어느 포티나이너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클레멘타인이라 불렀다네. 오, 사랑하는 클레멘타인. 이미 하늘나라에 사는 가엾은 클레멘타인. 요정 같이 명랑했던 클레멘타인. 작은 신발은 청어를 담은 상자를 이용해서 만든 나막신이었네. 날마다 아침 9시가 되면 오리떼를 몰고 강가로 나오곤 했던 클레멘타인. 그런데 어느 아침 발을 헛디뎌 범람하는 강물에 빠지고 말았지. 루비빛 입술은 물거품이 되어 떠내려갔는데 나는 안타깝게도 수영을 할 줄 몰랐다네. 사랑하는 딸 클레멘타인을 그렇게 잃었다네.”
노다지를 찾던 포티나이너들 대부분은 가족을 잃고 건강을 잃고 광산을 속속 떠났다. 그렇게 생겨난 서부 산간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소박한 교회당에 모여 찬송을 부르고 새 삶을 시작했다. 비로소 참된 행복을 찾기에 이른 것이다.
이 노래를 일제 식민시대 소설가 박태원이 광부의 딸을 어부의 딸로 내용을 바꾸어 번안을 했다. 광부의 노래가 어부의 노래로 변한 것이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바람 부는 하룻날에 아버지를 찾으러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가 져도 안 오네. 금빛 머리 샛별 눈에 그 이름은 클레멘타인. 고기잡이할 때마다 네 생각이 간절해.”
아마도 클레멘타인을 노래하며 바닷속 금맥을 찾아 그물을 던지던 어부들이었을 제배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들은 오야붕 시몬 베드로의 동업자로 고기잡이로 뼈가 굵어가는 중이었다. 수장 베드로를 따라 갈릴리 호숫가에 배를 대고 살았던 포티나이너들에게 엄청난 생의 반전이 생겼다. 바로 예수와의 만남이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살던 어부들은 부엉이나 너구리처럼 밤이 되어서야 슬슬 활동에 나섰다. 아홉시가 넘은 늦은 밤에 물로 나가서 새벽 네다섯시까지 고기를 잡는 게 수고로운 일과였다. 세마포를 기운 그물을 사용했는데 오늘날처럼 전등이 없으니 동이 터서야 그물 속에 물고기가 들어있는지 없는지 확인 할 수 있었다.
집에선 클레멘타인 같이 예쁜 딸이 아빠가 만선을 하고 돌아오길 기다리며 꿀잠을 자고 있을 터. 반드시 그물 가득 고기를 잡아 항구에 닻을 내려야 하는데, 어느 날은 고기라고는 씨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살다보면 그런 절박한 날이 있다. 아무 일도 내 맘대로 되지 않고, 번번이 장애물에 걸리고, 성사되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 믿음과 진실과 사랑은 황금만능주의에 묻히고, 허공을 디딘 듯 절망에 사로잡히는 날. 그런 날 예수는 내 텅빈 고깃배로 다가오신다.
달큼한 비린내처럼 뭍에까지 불어오는 바람. 놀던 공을 잃어버린 아이들처럼 망연자실하던 우리에게 공이 가득 든 그물을 들고 나타난 사람. 그리고는 손에 잡히는 공이 아니라 둥근 태양을 보게 하고 달을 보게 하는 님. 자석처럼 하늘을 가깝게 끌어당겨 보여주는 님. 그동안 바쁜 일상에 묻혀 잊고 살았던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아 살게 만드신 분. 야고보와 요한은 이렇게 응답했다.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누가 5, 11)
호숫가에서 쓸쓸하고도 눅눅한 삶을 살던 포티나이너들은 이렇게 본래의 고향, 하늘아버지 집을 향해 냉큼 돌아서게 되었다. 더 이상 그물이 찢어지는 만선을 기대하지 않고, 일확천금 횡재수도 기대하지 않아! 오로지 걷고 또 걸으며 예수와 함께 참다운 축복과 참자유를 노래하는 여행자들이 되었다.
가만히 한쪽에 머무는 삶
앞장서고, 나서기 좋아하고, 정중앙에서 가로막고 살려들 그런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비켜설 줄 알며 양보할 줄 알고 석양처럼 저물어 갈 줄 안다. 무엇보다도 가만히 머물줄 아는 삶이다. 하루는 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집에서 엄마가 저녁밥을 지을 때 어떻게 도와드리니?” “저는 감자를 깎아요.” “저는 마늘을 다듬어요.” “저는 설거지를 도와드려요.” 그런데 한 아이가 대답했다. “저는 가만히 비켜서드려요. 그래야 엄마가 편하게 밥상을 차리지요.”
자기 공로, 자기 활개침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공로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면 과연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공로가 있는 사람이 받는 보수는 자기가 마땅히 받을 품삯을 받는 것이지 결코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4, 1-5)
몬테카시노 수도원엔 다음과 같은 머무름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을 때는,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이 학교를 그만두고 싶을 때는,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이 사랑에 지치고 힘들 때는,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이 가족 때문에 정신이 헝클어졌다면,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싶을 때는,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이 삶에 지쳐 괴로울 때면,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의 아이 때문에 감당하기 힘들 때,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이 금방 죽을 것처럼 몹시 아플 때는,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이 기다리는데 지쳤을 때는,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이 도저히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가만히 머무십시오.
당신이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때는, 가만히 머무십시오.
떠돌던 여행 다음엔 가만히 한쪽에 머무는 정주의 삶이 기다리고 있음이렷다. 여행과 정주를 반복하는 것이 생애이며, 이 놀이를 잘 할 줄 알아야 맑고 성성하게 잘 살 수 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면 올리브 산에 올라가셔서 밤을 지내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이른 아침부터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몰려들었다.” (누가복음 21, 37-38)
늘 한자리에, 교회당에 오래 머물며 설교하는 사람들을 볼 때 아름답다. 내 주변 목회하는 친구들을 보면 시골 변두리에서 십년은 기본으로 한곳에 정주하며 수도승처럼 살아간다. 주님께서 저녁에 주무셨던 올리브 산처럼 깊디깊은 숲속에서 산새들과 잠드는 밤.
아무데나 도장을 찍고, 머풀러를 바람에 날리며 얼굴 팔리는 일에 부지런을 떨던 사람도 모두 이리 돌아와 머물라. 달리다 지치면 별빛 도란도란 익는 이 마을에서 차 한잔 마시며 쉬라. 올리브 산의 휴식이 없이는 성전에서 일찍 가르칠 말씀을 길러내지 못할 터!
청정한 매미 울음도 적잖은 머무름과 휴식의 뒤 끝에 터지는 울림이다. 헤매던 영혼들도 집에 머물면서 붉은 소파에 몸을 의지해야 한다. 가라앉은 듯한 침묵이 편안할 것이다. 굽이치다가도 도란도란 잦아들라. 텃밭의 김장배추를 기르는 손과 하얀 수건을 쓰고 파를 다듬는 손길은 복 있으라. 달빛 절룩거리며 걷는 운동장에 주소지를 둔 참새떼는 아이들이 먹다버린 과자 부스러기라도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 한적한 풀밭에 누워 시린 강물을 바라보며 보내는 하루도 복이 있다. 자족하면서 눈높이 바르게 하고 깜냥대로 사는 삶. 쪽잠 부스스한 얼굴로도 환히 웃을 수 있는 태평한 평화가 머무름 속에 있다.
방황하던 시절 뒤꿈치 부푼 물집도 나을 수 있고, 가파른 골목 뿌연 먼지를 남기며 달리던 트럭도 한숨 돌릴 수 있고, 자투리밭에 심은 푸성귀들 거두며 오지고 달진 마음에 감사기도 드리는 가을 하루.
투명하고 잔잔한 이야기들이 어디에서 나올까.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머무는 올리브 산과 성전 안마당이 없다면 들을 수 없을 이야기들... 목말라 깨진 술병으로 너덜거리는 골목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생명의 말씀... 봉숭아꽃잎을 따서 손톱 끝에 물들이는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달려 나오는 아늑한 집. 콘크리트 철골 구조물이나 한강철교와 광화문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맑은 영혼의 말씀은 보리밭길 따라 산촌에 머무는 법이다.
길섶에 희디 흰 구절초 한바리 꺾어든 가을에 그대 만나러 나는 ‘그대가 머무는 집’으로 가고 싶다. 허투루 살지 않고, 삿된 곳에 얼굴 들이밀지 않으며 산도랑 비탈진 언덕에 고고하고 꼿꼿하게 피어나서 선모초(仙母草)라고도 부른다던가. 눈발이 내리치면 삽시간에 종적을 감추며 저무는 그 우직함과 절개의 꽃. 닮고 싶은 꽃. 예수도 올리브 산에서 구절초처럼 하얀 옷을 걸치고 누우셨다. 세상에 살도 뼈도 내장도 다 내어주고 청초한 정신만으로도 광채가 났던 분. 사방 칠흑의 어둠속에서도 보름달처럼 밝은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분. 떠도는 집시의 추위를 덮어주며 수박처럼 뒹구는 천한 삶들을 거두셨던 분. 그분이 머무셨던 그곳에 나도 따라서 진중하게 머물고 싶다. 가만히 한쪽에 머물며 초롱초롱 눈뜨는 새날 씨앗들을 야무지게 틔워내고 싶다.
-------------------
임의진은 시인, 화가다. 10년동안 남녘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시무했으며, 지금은 산골에 은거해 고요히 살고 있다.
<예수 동화>, <참꽃 피는 마을> 등 여러 권의 책을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