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을 비는 말, '반갑습네다'
언젠가 홍근수 목사님 강연 때 들은 이야기다. 포르투갈 식민지 마카오에 살고 있던 한 중국계 여인과 포르투갈 여인에 관한 이야기. 둘은 우물을 사이에 두고 담장하나 너머로 요새 남북한처럼 원수지간이 되어 싸웠다. 중국계 여인은 포르투갈 말을 알고 있어서 그 나라 말로 욕설을 내뱉는데, 포르투갈 여인은 중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그래 여인은 아는 중국인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중국 사람이 들을 때 가장 화가 치밀만한 욕설 하나를 가르쳐달라 청했다. 그리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원수 같은 중국계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포르투갈 여인은 너 오늘 잘 만났다 코앞에다 대고는 갈고 닦은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그런데 반응은 예상과는 정반대. 중국계 여인은 순간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더니 포르투갈 여인을 와락 끌어안는 게 아닌가. 생각과는 정반대의 이런 태도에 포르투갈 여인은 짐짓 놀랐다. 하지만 진심으로 끌어안는 손길을 어떻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둘 다 눈물이 왈콱 쏟아져 내렸다. 가슴이 결릴 만큼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포르투갈 여인이 배운 욕설은 욕설이 아니라 축복을 비는 말 “꽁히파쵸” 였다는 걸.
“여러분들은 원수를 사랑하시오.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며 여러분을 헐뜯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시오, 당신의 한쪽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마저 내미시오. 당신의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마저 거절하지 마시오. 누구든지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고 당신 것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돌려 달라고 하지 마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 해 주시오. 여러분은 원수들을 사랑하고 잘해주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시오.” (누가 6, 27-31. 35)
최근 교회협은 MB 정부가 물자 반출을 허락하지 않는 상황에서 중국을 통해 밀가루 172톤을 북녘 동포들에게 긴급 지원했다. 작년 대북지원 물품 총액은 21억원, 2009년의 77억원에 비하면 3분의 1도 채 안 되는 물량이었다. 대북 식량지원사업은 강경일변도인 MB정권하에서 갈수록 축소되기만 하고, 단체들도 줄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감사편지와 함께 '인수 분배 확인서'를 보내오면서까지 2차 지원을 요청하고 나섰다. 평양의 가난한 동네 탁아소 어린이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인수 분배 확인서, 자존심 하나뿐인 북녘이 확인서까지 마련한 것으로 보아 지금 식량 사정이 어떠한지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교회협은 앞으로도 굴하지 않고 화평케하시는 주님의 뜻에 따라 지속적인 대북지원을 전개해나가야 할 것이다.
분단된 겨레 남쪽,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며 우리 입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다정한 축복을 비는 말은 무엇일까. 저 잔인하고 패악한 삼팔선을 걷어내고 예수처럼 먼저 손을 내밀며 “반갑습네다!” 인사하는 것이리라. “반갑습네다~ 형제 여러분 동포 여러분... 이렇게 만남이 반갑습네다~”
기나긴 분단의 세월. 서로 원수가 대어 앙앙거리는 조국 현실을 화해와 평화와 통일로 뒤바꿀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리라. 그러나 그간 MB 정부를 볼라치면 대통령 이하 적지 않은 개신교인들이 정권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화와 불통과 반목, 분단 고착의 정권이란 소리를 들어도 쌀 만큼 적대정책을 지속해왔다.
외경 도마복음엔 이런 말씀이 있다. “모든 것을 안다 해도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선구자란 ‘선천성 구제불능성 자기 도취자’라는 농담이 있다. 선구자를 자랑하나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고 내세우고 불화하며 자기도취에 빠진 그간이었다. 정작 굶주린 동포들을 나몰라라 외면한 게 몇 해째인가. 정권을 보지 말고 동포를 보는 눈은 과연 가질 수 없는 걸까.
그리스어 ‘에이스 텔로스(Eis Telos)’는 더욱 극진히, 더욱 뜨거운 사랑을 주문할 때 쓰는 낱말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셨다.” (요한 13, 1)라는 구절이 그러하다. 사람을 정말 극진히, 지극히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기억하라. 북녘땅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부활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아이를 잃은 한 여자가 슬피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길을 가고 있었다. 마침 길에서 시력을 잃은 화가를 만났는데 화가 또한 하나님을 심히 원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쿵짝짝이 되어 함께 길을 나섰다. 그러다가 전쟁통에 한쪽 다리를 잃은 병사를 만나게 되었다. 병사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를 갈았다. 절뚝거리며 셋이 길을 걷는데 큰 불이 나서 집을 홀라당 태워먹은 사람을 또 만났다. 그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망연자실해 있었다. 이렇게 네 사람이 같이 길을 걷다가 바람 부는 고갯길에서 터억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구동성 하나님께 따져 물었다. “우리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 왜 우리의 소중한 것을 당신 맘대로 빼앗으셨나요?” 그러자 하나님은 인자한 미소로 대답했다. “나는 어떤 것도 너희들이 소중히 여기는 걸 뺏거나 다시 돌려주거나 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단다. 다만 나는 너희의 아픔을 치유하고 되살리는(부활하게 하는) 하나님이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치유해야 하나요?” “이미 너희는 충분히 치유를 받았다. 지금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지 않는가. 서로 아픔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참된 치유요 부활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 가셨을 때에 베드로의 장모가 함께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부인의 손을 잡으시자 그는 곧 열이 내려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께 시중들었다.” (마태 8, 14-15)
손을 잡는 일은 이만큼 놀라운 일이다. 먼저 손을 내밀어 위로하며 기도함은 교회됨의 자세요 신앙인의 존재이유다. 예수는 항상 남을 위해 존재했고, 손을 내어주어 붙잡을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예수는 여러 가슴마다 푸르고 따뜻하게 살게 되었다. 예수는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내 생명의 은인으로 속속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본 회퍼 목사는 감옥에서 우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교회는 오직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이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교회는 모든 소유물을 고난받는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목사들은 절대적으로 공동체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살아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세상적 공동생활의 세상적 과업들에 참여하되, 지배해서는 안되며 돕고 섬겨야 한다. 교회는 모든 직업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남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말해야 한다. 개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범을 통해서 교회의 말은 권위와 힘을 얻게 된다.”
시방 교회와 그대 그리스도인의 손은 누구를 붙잡고 있는 걸까. 시대에 뒤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교회는 교회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모르고 사명을 배신하며 '헛된 노력'이나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선명성을 잃고, 어떠한 감동감화와 귀감이 될 수 없는 처지. 그 수렁에까지 떨어져 회생이 불가한 지경은 아닌가 심히 두렵다.
예수 당시 쿰란 공동체만 보아도 약자들의 손을 붙잡지 않았고, 오히려 내치는 공동체였다. “미치광이 정신이상자 천치 바보 소경 불구자 절름발이 벙어리 미성년자... 그 중의 누구도 공동체에 입회할 수 없다.” 이렇게 못을 박고 수도규칙을 삼았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는 전혀 달랐다. “맹인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사람들이 일어서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도다.” 메시아 찬가는 지금도 울려 퍼져야 한다.
만일 사람에게 육신의 세계뿐이라면 시간과 공간에 걸려 죽어버리면 그만인 존재다. 예수는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첫열매시다. 부활이란 새로운 삶, 새삶을 의미한다. 인간의 몸은 죽지만 고귀한 정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살리시고 영원히 우리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외아들을 내어주셨다. 이를 믿고 이 믿음 안에 거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부활사건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죽지 않는 영생불사가 된다. 끝없이 부활하는 새생명체가 된다. 우리에게 도대체가 전과 판이하게 다른 낯설고 놀라운 새삶이 주어졌음을 믿는다면 지금 이순간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겐 현세도 내세도 따로 없음이다. 오로지 부활의 영생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육신의 보이는 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 일이다. 예수 안에서 죽고 부활한 사람들은, 부활한 사람들을 반드시 서로를 알아보며 위로받는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삶
예수는 유명해지는 걸 원치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의 인척들은 생각이 달랐다. “이곳(갈릴리)을 떠나 유다로 가서 당신이 행하시는 그 훌륭한 일들을 제자들에게 보이십시오. 널리 알려지려면 숨어서 일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훌륭한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형제들의 청을 거절했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그리고 초막절 명절인대도 갈릴리에 계속 머물렀다. (요한 7, 3-9)
옛적 중국땅에 관영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친구 화흠과 같은 방을 썼는데, 어느 날 당시 꽤 유명한 스타가 신작로를 지나간다는 소식에 화흠은 읽던 책을 내던지고 구경을 나갔다. 관영은 화흠이 돌아오자 책상을 멀리하고 떨어져 앉으면서 “이제부터 자네는 내 친구가 아니네.” 선비답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였다.
또 어느 날엔 산속 텃밭을 일구는데 관영이 내리친 쇠스랑에 금을 담은 상자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관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밭을 일구었다. 화흠은 금덩어리를 들고 산 아래 동네로 달음질쳤고 이후 소식이 끊겼다. 위나라 임금 명제는 여러 차례 수레를 보내 관직을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관영은 농사지어 일군 도라지와 술을 보내 거절을 대신하였다. 부정부패에 찌든 신하들은 관영이 출세 길에 들어섰다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 심히 두려워하였다. 관영이 죽고 난 뒤 움막을 살펴보니 오십년 산중 생활에 남은 거라곤 명아주 책걸상과 글공부를 하느라 무릎이 닳은 바지며 농사일을 돕던 농기구가 전부였다.
예수는 보잘 것 없이 작은 것, 감추어진 것, 가난한 것을 편드시는 분이었다. 아니 그 자신, 종의 신분을 취하여 사셨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를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다.
예수가 붙잡히신 날 이런 말씀도 했다. “내가 나의 아버지의 도움을 불러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 분은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들을 내게 보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런 도움을 구하지 않고 외롭게 붙잡혔고 묵묵히 십자가를 졌다. 예수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추구했다. 우월한 자리, 높은 상석을 마다하며 사셨다. 대접받는 자리는 어색해서 금방 빠져나오고, 언제나 자리의 주인공은 신랑신부였지 그 자신이 아니었다(가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참된 권위를 지닌 예언자인 그분은 진리 그 자체를 만나게 하고자 일하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하라고 이르지 않으셨다. 예수의 권위라면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며 용서하고 민중들 속으로 투신하는 솔선수범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는 우쭐거릴 세상의 어떤 면면도 가지려 않으셨다. 하나님이 그분 마음 밖에 계신 적이란 한 순간도 없었으리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시편 46, 10) 뿐만 아니라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요한 15, 10)는 말씀에 충실하였다. 그래서 다른 어떤 곁눈질도 하지 않았으며 명예와 권력과 부요함을 좇지 않으셨다.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신 그분은 초막절 중간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예수께서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올라가셨다.”(요한 7, 10) 비까번쩍한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비서진과 부하들을 대동하고 다니신 분이 아니다. 자기 삶에 진실하고 충실하였을 뿐, 유명세를 즐기고 으스대며 거들먹거리신 분이 아니었다.
빗방울 전주곡
후둑후둑 장맛비가 쏟아지기 시작이다. 개울의 소금쟁이들은 비를 피해 풀잎 그늘로 숨고 살포시 벙글던 달맛이꽃도 아픈 빗줄기에 머리를 숙였으나 만장한 빗물에 그만 흠씬 젖고 마는구나. 개구리 홀로 텅텅 물속으로 뛰어들며 반갑다면서 갈갈댄다. 옴츠린 개구리들이 좋아라 박수를 치며 합창을 하면 빗소리가 무색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쇼팽의 피아노곡을 찾아설랑 전축에 올려놓는다.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듯한 빗방울 전주곡... 잠시 적요가 밀려들고, 개구리들도 숨을 죽이면서 이 곡을 물끄러미 감상하게 된다. 쇼팽을 사랑하지 않는 존재란 이 지구별에 없다는 게 내 호언하는 짐작이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에겐 지울 수 없는 한 여자가 있었다. 바로 프랑스 소설가 조르두 상드. 전엔 시인 알프레드 뮈세의 연인이기도 했었던 그녀는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명랑하며 진보적인 정치관을 가진 신여성이었다. 둘이 처음 만나서는 서로 호감을 느끼지 못했으나 쇼팽의 연애사가 비끄러지고 건강마저 악화되자 마주르카 섬에 요양을 떠나게 되는데, 이 때에 둘은 급속도로 서로에게 빠져들게 된다. 상드의 별채가 있던 촌동네 노앙과 파리를 오가면서 10년간 열렬하게 사랑했고 존중했다. 화려한 남성편력 속에서 거칠기로 소문이 자자하던 상드였지만 쇼팽에겐 전혀 예외였다. 지극한 병간호는 물론이고 모든 식단까지 쇼팽에 맞추어 준비했다. 오직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극정성으로 보필했다. 그러나 쇼팽의 건강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지독한 만성신경과민은 둘을 갈라놓았고, 장례식장에도 상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상드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쇼팽은 자신을 대표하는 [전주곡집]을 비롯한 작품 다수를 만들지 못했을지도... 그리고 오늘 빗방울 전주곡도...
지극한 마음 끝에 아름다운 곡이 나오듯, 주님께 기도할 때 비가 내린다.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야고보서 5, 18)
이사야 45장 8절은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노래한다. 하늘백성들은 비가 내려 정의의 싹이 자라기를 기원하였다. 가나안 부족들은 우상 바알이 비를 내리는 신으로 믿었고, 온갖 야만적인 기우제를 지내야 했지만 하나님은 썩어없어질 허망한 제물이 아니라 오직 진실한 기도만을 원하셨다.
비가 내린 뒤에 우리는 하나님을 뵐 수 있다. “그리고 보니 하늘에는 한 옥좌가 있고, 그 옥좌에는 어떤 분이 한분 앉아계셨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 같았으며 그 옥좌 둘레에는 비취와 같은 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4, 1-3) 비가 멈추면 무지개가 높이 뜬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평화와 안정, 밝은 신세계를 상징한다. 폭우 끝에 무지개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마침내 뵌 것이다.
인생엔 여러 차례 비가 내리고, 그 우중에서 우리는 속옷까지 젖으며 추워하고 또 가슴 시려워도 하게 되리라. 그러나 하늘이 비를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해갈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지개를 만날 수조차 없다. 세계는 물과 불과 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물은 사실상 세계 밖에 머물며 구름 속을 떠도는 유랑자다. 그 물이 빗물이 되어 하강하면 개울과 강과 바다를 이룬다. 단 한 방울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지극하게 땅이 받아모실때 빗물은 무지개를 띄워서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시마 약속을 준다. 그러니 다만 유랑자를 잘 대접할 일이다. 흘러가는 것들, 머물지 않고 떠나가는 것들 그러면서 가슴속까지 젖게 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빗소리처럼 피아노소리처럼 아주 잠깐사이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 서편에 무지개 하나 걸어두고 화창한 날들의 연속인데, 왜 이렇게 두고두고 그분을 향한 기억이 또렷하며 그리워만 지는 걸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빗방울 전주곡이 듣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자족하는 법
최승호 시인의 집엔 '다올'이란 강아지가 살고 있다. 손님이며 주인님 신발을 물어뜯어 거덜내기도 하고 꽃대를 끊고 싹들을 밟아버리고 더러운 걸레를 물고 다닌다. 어찌나 미운 짓을 하는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시인. 그래도 역시 시인이라 마구 두들겨 패지도 못하고 녀석이 하는 짓을 구경만 할 뿐이다. 이 녀석에게 끌려 다니다 보면 마음이 헝클어지고 괴로울 것이 분명하니 ‘다 옳다’ 그래 다올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원래 있던 이름을 버리고 새로 지은 이름이다. 혼내주고 싶은 못된 짓을 해도 다 옳다, 다올아! 이렇게 불러버리면 그 이름이 마치 메주 장독에 둥둥 떠있는 숯덩이와 붉은 고추처럼 헝클어진 광경을 맑게 씻어버린단다.
맞다. 감사하게 되면, 자신의 처지를 그저 감사하게 되면 세상이 딴판으로 달라 보이는 법이다. 감사신앙은 자연스럽게 사는 이치를 알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신앙이다. 주어진 처지와 상황을 바꾸기는 무척 어려운데, 자기 마음 하나 바꿀 수만 있다면 바람 치는 날 가지가 꺾인 나무가 울지 않듯이 아프다고 울 일도 드물 것이리라.
꽉 다문 문 틈 속으로 노을빛이 들이치고 있구나. 점차 어둑발 밀려들고 농사짓던 아짐 아재들 집으로 돌아들 가는 시간. 여자는 나이 들면 딸, 돈, 건강, 찜질방과 친구가 필요한데 남자는 마누라, 아내, 애 엄마, 집사람, 와이프가 필요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 않던가. 그런데 우리 동네엔 여자에게 있어야 할 것이 없고, 남자에게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큰부리까마귀가 불길하게 깍깍 울고 가면 혼자 된 촌로가 외롭게 이불을 들추는 소리가 가엾게 들려온다. 그러나 달콤한 잠이 그이를 또 내일이란 시간으로 운반해줄 것이며, 그는 건강하게 저 들녘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혜 교사 로레타 라로슈가 말한다. “스트레스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무엇이다. 따라서 스트레스 없는 삶은 도전과 열정이 없는 삶이니 스트레스조차 감사하라. 오직 자족하고 마음의 여유를 찾으라.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책감을 버려라. 항상 낙천주의자가 되라. 비관주의자는 기회 때마다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낙천주의자는 어려움을 기회로 받아들인다. 한편 과감히 포기할 줄도 알아라. 실패하고 포기할 땐 자존심 따위 내세우지 마라. 텔레비전 대신 음악을 들으며 마음의 조깅을 하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된다.”
바울 형제도 얘기한다. “내 처지가 어려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여러분은 나와 고생을 같이 해 주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족하는 법을 안 친구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같이 웃었던 사람보다 같이 울었던 사람이 더 많았다. 친구는 뭐니해도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친구다. 사루비아 꽃잎이 눈물 한 방울 머금고 피어나듯 우리는 모두 눈물의 사람으로 이 별에 살러온 존재들이다. 서로 애틋하게 바라보며 침묵속의 공감을 가져야지 주저리주저리 속엣말을 다 풀어놓는다고 친구가 되는 게 절대 아니다.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도 비관하지 말고, 항상 낙관하며 초록 강물로 유유자적 흐르기를... 그렇게해서 설레는 아침으로 내달음질 칠 일이다. 축축했던 기억 따위 지우고, 순간순간을 나팔손을 하면서 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들이라! 나뭇잎처럼 흔들리지 말고 나무 밑동아리처럼 듬직한 사랑을 품으라.
(2011.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