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군내버스, 파란색 하늘 대문
임의진(시인, 화가)
1
아장아장 걸어오는 새아침. 꼬꼬닭 두어 마리 마당을 질주하고 뒤따라 병아리떼 뿅뿅뿅. 앞서가는 닭 중 누구는 엄마가 분명해. 엄마가 아침 운동을 시키는 거야. 하나 둘 세엣 넷... 수다스러운 구령에 발맞추어 버드나무집 그늘은 드넓고, 마당은 닭똥 천지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가는 집은 시골에 드물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무섭게 짖는 개보다는 반갑다며 발뒤꿈치를 핥는 개가 훨씬 더 많다. 개조심이라고 써 붙인 집은 대개 외지인이 짓고 들어온 별장들이다.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온 똥개는 주인 할매가 보이자마자 이가 다 드러나도록 반갑게 웃는다. 하늘보다 더 파란 색깔 군내버스 첫차에서부터 막차까지... 탐스런 빨간 꽃양귀비 피어 바이 바이 손을 흔들어준다. 읍내로 출퇴근길, 또는 아이들 통학길, 동네에 남은 몇몇은 이제 목마른 들일을 해야 할 참이다. 면소재지 횟집 물고기는 오늘도 무사히 눈을 끔벅이며 구사일생을 비는 기도를 바치고, 해가 중천에 뜨자 불태산 한치재 촌닭집 닭들도 알을 품다가 부리나케 빽빽한 대숲으로 대피를 한다.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간밤의 어두움 같은, 짓누르던 고민과 불행한 고독 따위 화창하게 푸른 아침이면 안개처럼 싸악 달아나고 간데 없다. 새벽에 잠깐 가다듬은 용기와 기도가 농부들을 맹렬한 땡볕의 들판에다 의연하게 세우는 것이다.
남태평양에 여행 갔을 때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나 주워들었다. 태풍에 해변의 야자수들이 바람에 부러지고 꺾인 다음, 그 황량한 풍경 앞에서 원주민들은 망연자실하고 만다. 하지만 어린 야자수 몇몇을 골라서 위에다가 큼지막한 돌을 하나 올려놓는 의식을 한다. 이듬해 바닷가에 다시 찾아가보면 다른 나무들이 두세 배 키를 높일 때 여전히 그들 돌을 짊어진 야자수는 제 자리 걸음. 그러면 원주민은 이제 돌을 땅에 내려놓고 나무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남들은 다투어 하늘로 높이 높이 솟구칠 때 너희들은 너무도 무겁고 힘든 돌을 머리에 이고서 울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동안 너희들은 누구보다도 넓게 뿌리를 뻗을 수 있었단다. 그래 아무리 강한 태풍이 불어대도 절대 넘어지지 않을 만큼 강해졌단다. 이제 흰 갈매기가 나는 저 먼 곳까지 솟구쳐 오르려무나. 그래서 우리들을 태풍으로부터 지켜주고 마을을 지켜주려무나. 너희들의 이 숲의 군병이요 장자란다. 돌을 머리에 이고 엉엉 울었을 야자수들아. 이제부터 푸른 하늘만큼 푸른 바다만큼 웃고 또 웃으렴.”
비록 지금은 소쩍새보다 애끓는 울음으로 한 뼘의 수로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처지지만, 청명한 하늘아래 튼실한 거미줄과 같이 결코 끈을 놓아버리지 않고, 용기를 다지고, 희망을 새기며 조용하고 상냥하게 들녘을 응시한다. 논밭에 삽과 호미를 든 저 농부들을 보라. 등에 일곱 개의 불꽃이 붙은 칠성무당벌레처럼 일주일을 꼬박 바쁘게 살아가는 저 들녘의 군병이요 장자들...
땡볕에 아이스크림이 살사르르 녹는 한낮
하늘 빛보다 파란 군내버스 먼지 내고 지나간다
역을 마친 미모의 여배우 홀가분 빠져나가듯
무너진 담벼락의 동네를 휙 하니 뒤로 하고서
낮고 좁은 창밖으로 내다보던 노인의 눈빛
여배우와 마주 친다, 아가씨 어제의 나였던 아가씨
파랗게 멍이든 군내 버스는 가여운 영화 소품
어제의 나를 태우고 떠나는 영화 한 장면
2
주인이 들에 나간 사이 고양이가 널어둔 생선을 물고 내뺐다. 살점을 모두 뜯고 버린 생선 가시는 누구네 지붕에서 풍장을 한 모습일까. 물고기는 생각지도 못했을 지붕 위의 영생이여. 구름이 낮고 포근하게 내려와 그 산 위의 집을 끌어안을 때 생선가시는 다시 몸을 주워입고 하늘을 헤엄쳐 가리라. 나는 하늘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가끔 보고는 한다. 물고기가 어떤 때는 고등어가 되기도 하고 갈치가 되기도 하고 돌고래가 되기도 한다. 평상에 드러누워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만가지 물고기가 마치 수족관 같아라. 푸른 하늘과 푸른 땅과 푸른 바다. 그 파란 지붕아래 우리는 아가미를 열고 숨 쉬면서 인어처럼 살고 있누나.
엊그제 잠깐 목포에 갔었다. 제주 올레길을 밝혀낸 서명숙 님과 소설가 공선옥 누나를 비롯하여 몇 분 지인들 만나서 유달산자락 산동네를 산보했다. 선옥 누나 소설 <영란>의 배경이 된 가파른 유달산 달동네. 묘하게도 집집마다 골목마다 블루 대문, 블루 지붕, 블루 파도 그림, 블루 선박 그림이 목포 앞바다랑 매일반이었다. 수십 년 사납고 포악한 바다와 싸우며 <노인과 바다>에서처럼 불굴의 의지로 살았을 어부들. 가난뱅이 조각배로 연명해온 어부의 산동네...
온기가 점차 사라지고 없는 오늘날, 그러나 그 동네는 누구나 만나면 평상에 쉬었다 가라고 팔을 잡아당겼다. 누가 가슴 아픈 사랑 탓으로 술 먹고 받아버린 구겨진 가드레일, 옹이처럼 굵어진 손마디 구부려 스티로폼 하얀 박스에다 고추 농사를 짓는 할머니. 외곬으로 짱짱하게 버텨온 골목길 얼굴들엔 그러나 원망이나 분노보다는 평화나 이해, 용서가 더 깊이 자리하고 있더군.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우면서 살고 계시는 그 분들 가슴처럼 하늘도 블루 바다도 블루, 저토록 피멍들어 푸르지 않은가 싶었어.
마치 무슨 북미 인디언 추장 부인 같은 추장댁 할머니 파랑색 대문엔 아주 큰 매직글씨로 ‘추장덕’이라고 쓰여 있었다. 따순 밥을 담았던 그릇은 깨져서 뒤꼍에 버려져 있고, 대신 비닐봉지에 담긴 반찬을 그대로 꺼내 식사를 마친 소반 위, 파리 한 마리 오래사시라고 비비고 또 비비며 옥황상제 전에 기도를 바치고 있었지. 게서 수십 해, 이젠 거동조차 불편하여 추장댁 할머니 대문의 블루빛깔이 다 닳아질 때 쯤 하늘나라 파란 세상으로 헤엄쳐 돌아갈 것만 같았어. 어떤 날보다 하늘이 파란 날에 할머니 집 앞의 평상에 아이 천사들이 찾아와 이런 노랠 부르면 할머니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솟고 쑤시던 어깻죽지에 날개가 돋아 오를거야.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여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오- 블루 오- 풀과 나비 오- 풀벌레 소리
입덧 앓던 집으로 날아들던 하모니카 소리
앵두 같은 거짓말도 사랑이었네
추장님은 일찍 죽고 건기 보다는 우기
달 언덕에 몇 그루 나무와 티피 같은 움막집
유달동 추장댁 할머니 높은음자리표로
노래를 부른다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노래하다가 울먹이다가
푸르고 선명해지는 세월, 오 블루의 세월
선한 혼령이 된 추장님이 다시 열고 들어오는
블루의 대문, 하늘 문을 열고 찾아오시길
손꼽아 기다리는 추장댁 할머니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