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꺠춤 임의진, 떠돌이 별이 머무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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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임의진의 시골 편지] 삼시 세끼/ 경향신문 2015. 1.1
글쓴이 : master 날짜 : 2015-01-01 (목) 09:44 조회 :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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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 세끼

 
우박이 내렸다. 잠깐이었는데 후다닥 후다닥 누군가가 지붕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늦게 잤으니 늦게 일어나야 옳았는데 그 소리에 놀라 일찍 깨나고 말았다. 뱃속이 꼬르륵. 간밤 친구들을 만나 포도주로 대취하는 날이 아니면 아침밥 차리기 귀찮아서 가볍게 식빵과 커피로 대신하고는 한다. 오늘은 난데없이 밥을 지어먹고 싶어졌다. 밥상을 코앞에 차려놓고 이발소에 붙어있던 ‘기도하는 소녀’ 그림처럼, 그렇게 기도한 뒤 밥을 먹고 싶었다. 쌀을 씻어 밥솥에 얹는 일은 지겨운 반복이라 투덜대곤 하는데 배고파서 밥을 지을 때는 그렇지가 않다. 밥솥 전원을 누를 때 여자 목소리로 무어라 종알거리는 기계음조차 반갑다. 
 
한해가 이렇게 지나고 새해가 밝아온다. 죄를 지어 감옥소에서 콩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자유의 몸으로 흰밥을 지어먹는 삶의 연장. 천지신명께 감사할 일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어떨 때 행복하냐고. 갑자기 물어서 그런지 대답들이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 꼴깍꼴깍 숨넘어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대답이 한 줄로 이하동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게 밥 한끼 먹고 싶다고.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 집의 밥상은 얼마나 슬플까. 슬픈 새해일까. 세월호 이후 밥 먹을 때마다 목에 밥알이 한 번씩 걸린다. 내가 무슨 노란리본을 옷깃에 차고 댕기는 유별난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다. 부디 우리 모두 마음에 난 상처가 빨리 아물기를...
 
먹고 사는 수준이 제법 높은 한국에선 재물이 있으나 없으나 밥상은 대개 비슷하다. 목사 노릇하면서 나름 있는 집 없는 집 밥을 얻어먹어 보아서 안다. 캐비어인가 캐비넷인가 상어 머시기를 먹어도 그저 한 끼 특별할 뿐 금방 질리는 것이다. 손으로 김치를 찢어 밥을 먹는 즐거움을 아는 농부들은 저 들녘을 떠나지 못한다. 올해도 농부들은 못밥을 나눠먹고 탁주를 즐길 것이다. 행복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보다 백배나 많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는 멍청이만 있을 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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