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차
어디서 목돈이 좀 생겼나 소주병 한 박스 오토바이에 싣고 어칠비칠 달려오는 아재 꽁무니를 훔쳐봤다. 지난번 폭설에 눈길이 아직 미끄러워서 각별한 운전은 물론이고 고무줄 끈으로 잘 묶은 병 박스를 마나님 챙기듯 뒤춤으로 쓰다듬기도... 서울과 경기는 진로소주, 북한은 평양소주, 경상남도는 무학소주라면 전라남도는 보해소주를 마신다. 지구별을 대표하는 자유인 보헤미안보다 훨씬 음주가무에 능통 방통한 전라도 ‘보해미안’의 세상에 내가 산다.
소주박스에 침을 꼴깍 삼킬 뿐이렷다. 속탈이 나서 요샌 밤낮 유자차만 달여 마신다. 청도 모과차나 유자차를 때마다 보내주곤 하셨던 친구 스님은 무더운 남국으로 기도하러 떠나계시고, 십여 년 교인들이 챙겨주던 유자차는 이제 가게에서 사가지고 먹어야 한다. 직접 담근 유자차와는 향부터가 달라 서럽더라. 나 어릴 적 목사관엔 지붕에 닿을 만큼 큰 유자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아버지 목사님은 유자나무가 얼지 않도록 지푸라기로 감싸고 천막으로 덮어주며 한 가족처럼 아꼈다. 어머니는 밤마다 유자차를 묽게 끓여 한잔씩 주셨다. 감기에 그만한 예방과 직방이 없었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감기 걸린 세상을 더 염려했다. 유자차보다는 주께로 가까이 더 가까이 찬송가를 부르며 소주를 가까이 모셨다. 바닥 동무들과 어울리다가 이른바 민중교회를 꾸려갈 때는 주량이 술꾼이요 먹보라 불리던 예수님 다음번은 갔을 게다. 이제는 그때 마신 독한 술에 내상을 입어 유자차가 더 달고 고마운 한계점이다. 코가 언 날 유자차를 끓여주는 여자는 무조건 예쁘고 사랑스럽더라. 자연산 유자차를 보온물통에 담아 뜨거운 김을 불어대면서 같이들 마시고 싶구나. 독한 방귀를 잘 뀌는 누구는 자연산과 보온물통의 쓰임새가 다르기도 하더라만.
아무쪼록 소주는 적당히, 그리고 뜨거운 유자차 자주 마셔서 독감 걸리지 않기를! 일단 건강하게 버티고 견뎌야 언젠가 좋은 날도 보지 않겠는가.
(글, 그림/ 임의진)
<경향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