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꺠춤 임의진, 떠돌이 별이 머무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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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나에게 당신에게 쓰는 편지/ 임의진/ 광주일보
글쓴이 : master 날짜 : 2014-11-13 (목) 23:29 조회 : 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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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의 모든 이인 그대에게 띄우는 편지

 
 
임의진

 
 
 
은행잎으로 기슭까지 노을이 물드는 숲속. 떨어진 잎사귀가 나무 곁을 맴돌며 서성이듯 나는 이곳에 옹종거리며 그대를 생각하네. 찬바람이 일기 전 추위를 견딜 장작개비도 충분히 장만해 놓았네. 간벌을 마친 산에서 굴린 굵직한 참나무들로 마당 귀퉁이는 꽉 채워졌지. 책을 수직으로 쌓아올려야 운신할 수 있었던 책방. 바깥으로 하나둘 벽돌을 쌓아 집을 늘리는 일도 마쳤다네. 그러면서 올 가을 내내 몸을 부려 일을 했고, 외출옷도 얼룩덜룩 작업복이 되어버렸어. 긴 겨울밤을 견딜 양초도 넉넉히 확보해두었네. 그대는 겨울나기 차비를 어떻게 해두었는지. 여유를 부릴 수 없는 늦가을이네. 덫에 친 짐승처럼 웅크리고 떨지 않으려면 지금 부지런을 떨어야 할 시간이라네. 

 
심야버스 뿌연 입김으로 그려진 사랑의 하트. 연인들은 오늘도 귓속말로 사랑을 속삭이네. 추위는 마음이 늙고 추운 사람들의 투정일 뿐. 그대여. 대낮을 가르던 쓰르라미 울음소리가 사라졌네. 이 행성은 노래가 그치면 어느 은하저편보다도 외롭고 쓸쓸한 별. 다시 노래를 부르세. 불을 지피고 언 손과 언 목소리를 녹이세. 일하다 뜯겨진 바짓가랑이 실밥을 지지다가 라이터불이 따뜻하여 아예 장작불을 작정하고 지폈다네. 전기불빛이 아니라 나무가 타는 난로 불빛 아래서 시방 그대에게 노랫말 같은 편지를 쓰네.

 
 
무수한 익명들이 산촌을 다녀갔다네. 편도의 바람은 왕복의 등산객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으나. 파랗고 무성하게 흔들리던 나무들이 이제는 고승처럼 야윈 지팡이 하나로 서서 늙고 병든 새나 안아주는 시간. 나는 이 숲에 깃들어 오래도록 이별의 순간을 기다리고 준비했다네. 뚝방의 맨얼굴 코스모스도 나처럼 간절히 까치발을 들고 작별을 고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피곤에 지친 남루한 인생들. 가난한 사람들. 그 곁에서 나는 이별의 노래를 불러왔네. 사랑이여. 검은 간장 속에 와사비 푸른 빛깔이 맵지만 달콤한 것처럼 검은 죽음들 속에 맵고 쓴 사랑의 밀어들이 감추어져 있다네. 찔끔찔끔 우는 멧새는 대체 어떤 사랑의 내막을 지닌 걸까? 하늘이 으등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검은 구름이 밀려드는 날. 그대여. 여기 하얀 눈을 보내주오. 푸른 별빛은 감춰두고 모퉁이 찢긴 이 외딴 집에, 옴짝달싹 못하는 이 함정 같은 집에 한뭉텅이 눈보라를 보내주오. 떠나가는 마음, 떠나보내는 마음마다 새하얗게 축복해주오. 

 
시린 발등을 덮어주는 하얀 면양말의 포근함. 하얀 솜털눈의 간지러운 단잠.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길을 걷는 노동자의 지친 어깨에도 흰 눈을 뿌려다오. 사랑하는 친구여. 시인이며 마법사인 당신이여.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다시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낭송되었던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 시나리오가 빵점 처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시. 국내 심사위원은 눈물겨운 작별이 무조선 싫었던 모양이지.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을 수백 번 수천 번 되뇌이면서 나는 오늘도 세계와 작별하는 법을 암송한다네. 

 
올해와 이렇게 우리는 아쉬운 작별이라네. 머물고 가는 바람, 길을 떠나기 전에 촛불 하나를 밝히세. 나는 언제나 사람이 많은 동네와는 등 돌리며 살고 싶었네. 손닿으면 금방 녹아버릴 송이눈 같은 목숨. 수북이 쌓여 버석거리는 잎사귀들로 지면을 삼아 부질없는 편지나 쓰면서 소일하고 싶었네. 근접한 소란이 두려운 때문이라네. 질긴 간섭과 생사고락의 인연이 얼마나 징그러운 드잡이임을 일찍이 알았으니... 이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 

 
선인장처럼 따가운 가을볕과 젖몸살에 드러누운 어미 개와 방울을 울리는 구름들이 지나가면 시간도 따라서 흘러가지. 장미도 시들고 궁금한 것도 간절한 무엇도 없는 밤은 깊고 긴 잠을 늘어지게 자겠지. 초연히 사라지는 오늘이여. 과거를 버리는 일도 그렇게 초연했으면 싶다네. 

 
오! 그대여. 이 겨울밤이 지나면 새로운 아침이 밝아올테지. 사랑한만큼 소중한 새날을 선물로 받겠지. 접질린 발목이 부을 때 얼음찜질을 하듯 이 겨울의 얼음장은 폭압과 무지몽매의 부기를 식혀주고 병든 영혼들을 조금이나마 치유해줄 것이네. 미장원에 뭉텅뭉텅 잘리운 머리칼이 떨어지듯 허망한 약속의 파기, 약속의 져버림들로 안타깝고 분하였던 마음. 풍요 속에 감추어진 궁핍의 응달바지들. 캐럴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심심하여도 개그맨의 코믹 캐럴은 듣고 싶지가 않네. 고요하게, 차분하게 세밑에 서서 당신과 눈뜰 새로운 아침을 기대하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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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임의진의 시골편지>를 8년째 매주 연재하고 있다. 광주정신으로 빚은 시민자생 예술공간 메이홀 관장이며 담양 수북에 살고 있다. <참꽃 피는 마을>, <앵두 익는 마을> 등 여러 권의 수필집과 <여행자의 노래> 등의 월드뮤직 선곡음반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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