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꺠춤 임의진, 떠돌이 별이 머무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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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 편지] 설탕물/ 경향신문
글쓴이 : master 날짜 : 2014-07-30 (수) 12:32 조회 :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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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물
 
 
 
지금은 먹을 게 많아져서 아이들이 과체중 뚱뚱이가 많이 보이지만 예전엔 홀쭉이들이 배로 많았다. 홀쭉이들의 장점은 개구멍을 쉽게 드나들 수 있다는 거. 여름엔 수박밭에 서리를 하러 가기도 했는데, 빼빼 마르고 날렵해 보이는 홀쭉이들을 앞세워 밤마다 곳곳에서 서리도둑질이 펼쳐졌다. 수박이나 참외를 지키기 위해 주인장은 높다랗게 원두막을 짓고,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하는 그 원두막엔 파란그물망 모기장이 별들을 거르는 채 마냥 밤새 살그랑거렸다. 라디오에서는 조용필 오빠 신청곡과 이종환 아저씨의 디스크 쇼,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 여기저기서 골든 팝송들이 가사 내용과 함께 지글지글 끓어 넘치고 있었고.
 
 
나는 어려서 자주 아팠다. 국민학교 다니면서 개근상을 받은 일이 드물었다. 다운 장애인이었던 형은 누워있던 나를 위해 설탕물을 타주었고, 물론 자기가 절반 넘게 꿀꺽꿀꺽 마셔댔지만... 고마워서 언젠가 수박밭을 지나다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둘이 밭에 숨어들어 수박서리를 했던 날을 기억한다. 덜 익은 수박이었지만 얼마나 달았던지 내 입술과 혀가 남들보다 더 빨개진 거 같았다. 천사였던 형은 나의 꾐에 빠져 그날로 천국에서 쫓겨나는 신세였고. 에덴동산에서 몰래 딴 금단의 열매가 그렇게 달았을까. 세상은 괴로웠어도 사랑은 설탕처럼 수박처럼 달았다. 우린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세상에 없는 줄로만 믿었다.
 
 
속을 모두 파먹고, 절반의 수박 통에 남은 붉은 물. 그 물을 쪼옥 마셔본 일이 있는가? 그 물을 동무와 나눠 먹어본 사람은 안다. 마주앉아 함께 머무는 그 다디단 맛을. 설탕 한 숟갈 물에 풀어 나눠 마셔본 아이들, 지금은 어른이 되었을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에서 다디단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무리 괴롭고 쓴 맛의 인생일지라도 우리들 그날의 추억을 잊지 말자꾸나. 장마 그치고 폭염의 연속. 짜디짠 땀의 인생 가까이 가난한 설탕물이 한사발. 당신이 들고온 수박한통에 둘러앉으면 그게 바로 천당이지. 십자가도 불상도 다 필요 없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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