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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 편지] 멸치 같은 사람들/ 경향신문
글쓴이 : master 날짜 : 2014-06-25 (수) 16:38 조회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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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같은 사람들
 
 
 
눅눅한 날이 잦아 쌀독에 벌레가 났는데 마당에 널었더니 새들이 훔쳐먹고. 잠깐 나갔다오니 소낙비 맞아 못 먹게 되고. 쌀독이 바닥이 나서 국수나 한 그릇 끓였다. 손 쉬운 라면은 있으면 꼭 먹게 돼 사놓지를 않는데, 궁상맞은 독거생활 주제에 건강까지 챙긴다고 비웃으시겠네. 귀찮더라도 멸치로 국물 우려내어 국수 한 그릇. 열무김치도 잘 익어서 양대 국물로 속이 간만에 편안해졌다.

 
삼치 참치 갈치 바닷물고기들 속에 새끼손가락만한 멸치가 살고있다. 고래가 새우만 먹는 게 아니라 멸치도 먹는데, 멸치떼가 좋아설랑 우리 해안에 눌러 산다는 걸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더라. 심지어는 먼 바다에서 멸치를 즐기는 멸치 고래라는 이름을 지닌 고래도 있단다. 원무를 그려 춤추면서 고래를 희롱하기도 하고, 거대한 모양으로 고래에게 위협을 주기도 한다. 뭉치지 않으면, 단결하지 않으면 멸치는 살아남을 수 없다.

나도 여름엔 맥주 술고래. 친구들이랑 시원한 맥주를 즐기는데 안주는 고추장에 찍어먹는 멸치 안주가 최고렷다. 베를린에 잠깐 지낼 때 루터교회 친구랑 죽이 맞아가지고 만날 맥주로 밥을 대신했었다. 고향 어머니가 챙겨주신 멸치와 고추장에 반한 키다리 친구는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해 하더라. 이제 다시 먹을 수 없는, 어머니가 챙겨주신 멸치와 고추장.
죄고만하고 풍성하지 않아보여도 짭짜름 고소할 뿐만 아니라 깊은 국물 맛을 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멸치. 우리네 진솔한 민중들, 무리지어 오가는 서민들... 세상에 국물 맛을 내는 멸치 같은 친구들. 속이 훤히 다 보이는 투명한 멸치. 거짓됨이 하나 없이 투명한 몸으로, 멸치는 시방 바다와 육지에서 떼를 지어 움직이고 있음이렷다.
 
나는 오늘 당신을 멸치라 부르고 싶다. 고래를 전혀 부러워하지 않는 멸치. 고래는 멸종할지 모르나 멸치는 쉽게 꺾이지 않아. 웃고 울며 단결할 때, 한 무리 한통속일 때 멸치는 절대로 지지 않아. 깨어있는 시민들처럼 대오를 갖춘 멸치로 바다 속은 오늘도 짱짱하게 대치중이다.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짠맛까지도 멸치의 공덕이 아니겠는가.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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